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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기사입력 2004.07.27 0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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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고장 역사속 인물]
    다산 정약용 선생  <사진>


    다산 정약용 선생께서는 1762년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재는 남양주시 조안면)에서  아버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씨 와 어머니 해남윤씨 사이에 4째아들로 태어났다.   
    1783년 22세 되던 봄에 소과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성.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중용을 가르쳤다.(소과시험이란 : 양반자녀만 응시할 수 있는 진사. 생원의 자격시험임(500명 합격) 소과합격자 중 5차례의 시험을 거쳐 성적이 우수한 200명에 한하여 대과시험 응시자격이 주어짐) 
    그러다 28세가 되던 1789년에 과거시험 문과에 2등 급제했다.(과거시험이란- 대과시험으로서 문과. 무과. 잡과로 나누어져 있었음) 
    과거시험 합격 후 경기도 암행어사, 병조참의(정3품) 부승지(종4품)를 지내며 배다리 발명, 화성 설계.축조, 거중기 발명 등으로 정조로부터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아 12년동안 정조를 보좌했으며 1800년 정조가 돌아가시고 1801년 순조가 즉위하면서 세력쟁탈을 위한 사색(노론,소론,남인,서인) 당파싸움에 휘말려 남인을 제거하기 위한 천주교 탄압사건인 “신유사옥”(또는“신유박해”)이 일어나 이 사건으로 인하여 당시 천주교리를 공부한 이승훈, 청나라 주문모 교리, 이가환, 셋째형인 정약종 등 남인세력이 사형을 당하고, 본인 다산은 경상북도 장기(영일)로, 둘째형 정약전은 완도 신지도(섬)로 유배를 가게되었다.
    (※ 이승훈은 정약용의 매형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중국에 가서 세례를 받았음)
    당시 다산 선생님의 사상(思想)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 학문(현재 실학사상)인지라 당시 왜세를 배척하고 불교문화와 유교사상(인간과 자연의 일치론을 주장한 성리학)을 장려하는 세도의 권력에 탄압되었다.
    (12살의 순조를 왕에 보위하고 딸을 순조와 결혼시킨 후 실권을 잡은 김조순 권력에 의함 -
    안동김씨 세도정치라 함.) 
    동년 11월 황사영(약현의 사위)이란 조카사위가 조선에서 일어난 천주교를 탄압하는 사건들을 적어 중국(청) 주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글을 써 보내려다 발각되었다. (황사영 백서사건이라 함.) 
    이로 인해 본인 황사영은 사형을 당하고 약용과 약전형님이 공범으로 지목받아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혐의사실이 없음을 인정받고도,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본인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되어 (1801년 당시나이 40세) 18년동안의 유배생활이 시작되었다. 
    강진읍내 동문안 주막에서 5년을 거주하였고(당시 관의 감시가 심함- 주막 담장을 철거했고, 현감(군수)의 동향보고가 수시로 이루어지는 등 당시 관의 감시가 심하였으나, 1805년 정순대비가 하야하고 안동김씨의 세도정치 시작으로 인하여 감시가 다소 풀려 주거 이동이 가능해짐.) 
    다산선생은 고성사 보은산방에서 1년(제자6명, 장남을 가르침), 목리 이청이란 제자집에서 2년, 모두 8년을 강진읍내에서 지내고, 1808년 봄에 귤동마을 외족인 윤단씨의 배려로 이곳 초당으로 이거하여 10년동안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다산초당에서 생활하시면서 후학을 가르치시고 제자 18명과 함께 50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다산이 초안을 작성하면 제자들이 기록을 했다고 함.) 
    1818년 당년 58세에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가 미완성된 책을 마무리하면서 여생을 보내시다 1836년 당년 75세로 생을 마감하셨다.
    초당에 오시기 전에는 정약용 선생님의 호는 삼미자, 용보, 미용 등 여러가지 호를 사용했는데 이곳에 와서야 다산이란 호를 사용했으며(삼미자란 : 다산선생이 어려서 천연두로 인하여 본인의 왼쪽 눈썹이 3개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여 불리어진 호라고 함)
    한편, 다산이란 호를 사용한 이유는 현재 초당에 위치한 만덕산은 자연의 차가 많이 분포되어 있어 마을사람들이 부르기를 다산이라고 불렀으며, 이름도 모르는 정씨라는 사람이 살고 있다해서 다산 정씨 또는 정다산이라 불리워졌으며 이때부터 호를 다산이라고 사용했다고 한다. <강진 신재희 차장>
    입력20040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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